평안과 나 사이의 거리 | 최재식 | 2022-1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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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과 나 사이의 거리예수님과 동행하고는 있지만, 그분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제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라는 말씀부터가 명령형이었다. 군대에서도 상관의 명령에 즉시 복종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은 더 높은 분이셨다. 그분의 명령에 복종해야 옳았다. 근심하지 않을 이유도 무려 세 개나 있었다. 주님과 함께했던 경험 지식, 천국 소망, 그리고 재림 약속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 남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예수님의 말씀들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친히 유대인 문화 코드에 맞춰 설명해주신 덕에 제자들의 눈높이와 딱 맞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복종하지도, 설득당하지도, 친근히 대화를 따라가지도 못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명령을 무시했고, 믿음 대신 근심과 의심을 고집했다. 예수님이 진실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한 제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 요 14:5 도마는 여전했다.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즘 말로 “제가 알 게 뭡니까”라는 뉘앙스로 진실을 간단히 쳐냈다. 그러나 이 무례한 태도에도 예수님은 신실하게 응답해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 14:6
도마는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길은 개인과 국가 구원의 길이었다.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성경을 붙들고 논의해온 내용이기도 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 로마 치하에 있는 현재의 국가 전복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 출애굽을 이끈 광야의 모세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를 찾는 길.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길.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길. 가난을 끝내는 길. 어둠을 몰아내는 길. 천국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따라오라고 부르셨다.
도마는 이에 순종했다. 삼 년이나 함께했다. 그런데 동행할수록 모를 일이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적들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분의 행적은 의아했다. 그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분의 영향력은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할 정도였지만, 상식을 뒤집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분은 정당을 세우지 않으셨다. 현직 권력자들에게 돌진해 충돌과 전복을 일으킬 만한 ‘맨파워’를 규합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머니파워’가 있는 것도, 기존 질서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사자처럼 군림하려는 의지는 아예 없어 보였고, 하다못해 종교 지도자들을 깨부수지도 않으셨다. 그 대신 정결법을 지킬 때 써야 하는 물을 몽땅 포도주로 바꾸셨다. 금식일에 식사하셨고, 안식일에 일하셨다. 고향에서는 도망 나오셨고, 이적에 열광하는 군중은 돌려보내셨다.
홀로 기도하러 다니셨고, 돼지 떼 이천 마리를 몰살시키셨고, 비유로 가르치셨다. 듣겠다는 사람은 돌려보내고, 들을 귀 없는 제자들은 삼 년이나 끼고 다니며 설명하고 또 설명하셨다. 그 외에도 의아한 부분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떠나신다는 것, 배반당하고 끌려가 고난받고 죽으신다는 것, 그리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모두 도마가 찾던 길이 아니었다.
근심과 불안의 원인이 거기 있었다. 예수님 때문이었다. 도마의 의중을 헤아린 예수님이 그에게 익숙한 길을 제시하셨다면 걱정은 없을 것이었다. 도마는 예수님 바깥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 확언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 요 14:6 상 단순하기 그지없는 말씀. 도마의 의중을 꿰뚫고 주신 답은 길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도마가 찾던 그 길이심을 선언하셨다. 이 말씀 앞에서 도마는 예수님과 충돌했다. 자기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 여태 예수님 밖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그에게 예수님이 곧 길이라는 말씀은 생각을 정지시키는 의외의 답이었다. 이제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다시 순종할 기회가 주어졌다. 예수님의 생각이 자신과 다름을 알았고, 결정할 순간이었다. 자기 생각을 유지할지 아니면 부인할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불안하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불안했던 이유다. 평안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도마가 근심을 떨치려면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이렇게 신앙고백을 드리면 될 일이었다. “아멘! 제 생각은 틀렸고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러나 도마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제자가 끼어들었다. 눈치 없이 예수님의 대답은 무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마치 도마를 향한 예수님의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물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요 14:8
빌립 역시 길 바깥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삼 년간 천국 복음을 전하며,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눌린 것을 자유의 상태로 회복하시는 예수님과의 동행이 헛것이었다. 그분의 말씀 앞에 자연도 복종하고, 물리 법칙이 움직이던 놀라운 경험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계속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을 찾았다.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동행했다는 점에서 도마와 같았다.
예수님은 빌립에게도 설명해주셨다. 그동안 함께하면서 보고 들었던 것, 체험한 사실들을 근거로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청하셨다. 동시에 믿음을 요구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요 14:11
도마나 빌립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자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 있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그랬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지 못했기에 근심에 잠겨있었다. 제자들의 모습이 우습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모양이 마치 손에 휴대폰을 들고 온 집안을 헤집으며 “내 휴대폰 어딨지?” 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을 보며 가슴이 뜨끔하다. 다름 아닌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근심한다. 매사에 평안이 없다. 왜일까?
여기에는 성경과 같은 이유가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는 있지만, 그분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다. 내 생각을 예수께 관철시키려는 꺾이지 않는 고집 때문이다.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말씀은 불편해하기로 결정한 아집 때문이다. 그리고 무지 때문이다.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밖에서 평안을 찾아다니는 무지함이 바로 근심의 원인이다. 평안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 계신 주님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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