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서 평안으로 | 최재식 | 2022-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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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서 평안으로걱정에서 벗어나는 순간!
한때 개를 키웠다. 병도 자주 걸렸다. 특히 피부가 약했다. 지각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후각도 나빴다. 그런데 강했다. 나는 그 녀석의 불안이나 슬픔을 본 적이 없다.
쭈는 나만 보면 엉덩이를 좌우로 움직였다. 엄청난 속도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벌의 날갯짓에 맞먹었다. 쭈는 엄청 잘 잤다. 고양이처럼 계속 잤는데 매번 숙면이었다. 드르렁드르렁 코도 골았다. 때론 시끄러워서 누군가 쭈를 깨워야 했다.
쭈는 늘 기쁘고 평안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배가 고프나, 아플 때조차 아무 근심이 없었다. 평안했다. 그런 쭈 앞에서 나는 으쓱했다.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개~평안하다니! 아마도 내가 주인 역할을 개~잘하고 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기뻤다. 내 엉덩이도 흔들렸다. 콧노래도 나왔다. 목사라 대부분 찬양이었다. 찬양하다 보면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이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평안할까?’
그러자 먹먹했다. 나는 쭈만큼 평안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을 믿을 때 안전하며 평안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 구절을 암기하고 있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요 14:1
그러나 지적 동의가 곧 내 존재의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쭈만큼 평안하지 않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했다. 교회의 크고 작은 문제뿐 아니라 잠정적 문제까지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인생의 결핍을 발견할 때면 불안을 느꼈고, 악인이 잘되는 걸 볼 때도 평안이 사라졌다. 내게는 한낱 죄인 인간을 주인으로 둔 짐승 수준의 평안조차 없는 것 같았다.
집에서 키우는 개조차도 인간 주인 때문에 항상 평안하다면, 하물며 창조주를 주인 삼은 크리스천은 어때야 할까? 개보다는 평안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엉덩이에 꼬리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흔들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시다(마 6:24). 물론 그분 앞에 사람이 애완동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관계다(요 1:12, 고후 11:2, 눅 12:4). 크리스천은 창조주를 주인이자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크리스천,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인생은 걱정이 불필요하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틀림없다. 창조주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으니까(요일 4:9,10). 세상 어떤 문제도 하나님보다 작다. 그분께는 세상 어느 것도 이기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요 16:33). 그러니 크리스천은 근심 걱정이 필요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심지어 죽어도 사는 존재다(요 11:25). 안심하며 무한히 기뻐할 일만 남은 인생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별로 기뻐하지 못하며 산다. 목회 현장을 둘러보면 불안해하는 사람투성이다. 특히 시대적 변화를 경험했던 팬데믹 기간에 불안은 더 커졌다. 많은 사람의 마음이 쇠약해졌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발표한 ‘최근 5년(2017-2021년)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료현황 분석’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우울증 환자는 약 35퍼센트, 불안장애 환자는 약 32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이십 대의 경우,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우울증 환자가 127.1퍼센트나 늘어 육십 대 환자를 제치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제 우울과 불안은 이십 대에게 흔한 질병이 되었다. 대처할 수 없는 변화 앞에서 청년은 먹고살 길이 보이지 않고, 중년은 노후 준비가 어려워졌으며, 노년은 남은 인생이 두려워졌다. 평안이 없는 시대다. 평안을 앗아가는 생각은 수없이 많다.
‘혹시라도 갑작스런 질병의 발견으로 병원비가 왕창 필요하면 어쩌지?’ ‘돌연 큰 사고가 나서 처리하느라 감당치 못할 청구서라도 받는다면?’ 그뿐만이 아니다. ‘새로 등장하는 기술들 앞에 원시인 같은 나는 어쩌지?’ ‘120세 시대가 되었다고 하는데 내 몸은 60세도 못 넘길 것처럼 골골대니 어쩌지?’
예수님을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 이런 근심이 있다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도 평안이 없다면, 그 이유는 뭘까? 왜 그런 것일까? 잠시 염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염려를 믿음과 연결시키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 6:30
염려와 믿음은 반비례한다. 큰 염려는 믿음 없음을 뜻하고, 큰 믿음은 염려 없음을 보인다. 겉으로 인식되는 염려가 곧 그의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셈이다. 염려의 원인 중 하나는 ‘결핍’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염려는 결핍에 대한 것이었다(마 6:25). 결핍을 염려가 아닌 평안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시 23: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결핍이 염려의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결핍을 포함한 모든 환경적 문제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을 때 평안이 임한다. 염려 반대편에 평안이 있다. 그리고 염려와 평안의 크기는 믿음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믿음이 커지면 평안도 커지고, 믿음이 작아지면 염려가 커진다. 평안이 없는가? 염려와 불안이 있는가? 어떤 문제로 밤잠을 설치고 있는가? 예수님에게 충분히 집중할 수 없는 어떤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근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합법적으로 주신 주님은 당신에게도 이렇게 명령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 14:27
-불안에서 평안으로, 송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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