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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손을 내밀어 그분의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최재식 20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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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손을 내밀어 그분의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오늘도 따뜻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막 5:25-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사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착취라는 원죄의 병에 걸린 인간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녀가 생각합니다. ‘예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예수의 옷을 만집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의 손을 잡았을 때, 착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다시 말하면, “네 믿음이

공급이 끊어진 불안에서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착취의 원죄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

이 불치의 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으로 손을 내밀 때,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간절함은 어떤 방법으로도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겪고 있는 착취의 병은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입니다.

 

이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간절함으로 손을 내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손을 내밀어 그분의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오늘도 따뜻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손을 내민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저분의 손을 잡으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손을 내밀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빌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비록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앞서 7장과 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께서 ‘공급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웃의 것을 착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안전합니다. 맞잡은 손을 통해 예수께서 새롭게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이 믿음을 가지고 착취하는 삶을 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착취를 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과감하게 착취를 끊어보십시오.

 

“나는 착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착취의 삶을 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나의 외로움을 달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줌으로 그의 정서적 필요를 채우는 존재다.

나는 돈을 움켜쥐고 나만을 위해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돈을 나눔으로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존재다. 또한 나는 하나님을 전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다.”


이런 결단과 함께 착취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고, 하나님의 공급을 구해보십시오.

그때부터 하나님의 놀라우신 공급이 시작될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이것을 경험해보셔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착취’에서 ‘섬김’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막 10:26-28]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제자들이 놀라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사람은 그 원죄로 인하여 착취의 삶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도, 레닌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때, 우리는 착취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는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착취의 사슬을 끊은 것입니다!
착취를 멈추고,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통장의 모든 잔고를 필요한 곳에 나눠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저에게 두 번 있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얼마 안 되는 통장 잔고였지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한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혹시 가족들이 아프거나,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한 비상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잔고를 털어 필요한 곳에 헌금했던 날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자유와 행복! 비록 통장은 제로가 되었지만, 그곳에는 놀라운 자유와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재정적으로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재정이 채워졌고, 오히려 풍족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임을 압니다. 우리는 착취하지 않아도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눌 수 있는 존재이며, 형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맞아요, 여러분은 형제와 자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태초의 정체성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니까요.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하고 고귀한 여러분의 본모습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빌리브갓  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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