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양식

  • 홈 >
  • 말씀과 찬양 >
  • 생명의 양식
생명의 양식
너무 편파적이다. 최재식 2017-09-26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93

http://swchangdae.onmam.com/bbs/bbsView/93/5326029

 

너무 편파적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라.

 

내가 해 아래서 본 한 가지 악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것이 더욱 위험한 까닭은 고의적인 악한 뜻 없이, 즉 그릇된 의도 없이 부주의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에게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악한 일이다.

이것은 이미 복 받은 자들을 큰 소리로 축복하고, 복 받지 못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어떤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를 찾아왔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그를 대접하는 사람의 위신을 크게 세워줄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정이 앞다투어 이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융숭하게 대접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인은 어떤 가정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기독교 공동체의 변두리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저 큰 날에 심판받게 될 큰 악이요 죄이지만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우리 중 이것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비판하는 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이 죄가 있다고

인정하며, 온전히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을 비판하는 바이다.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는 사람은 방대한 규모의 기독교 재정이 사실상 돈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가난하고 어렵고 도움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이고 우리와 함께 주님을 모시는 종이지만 관심 밖으로

밀려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교회도 세상만큼이나 눈이 멀어 있고 편파적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도움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베푸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을지라도 그들이 보답하면 우리의 선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 경고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현재 교회들의 신앙적 활동은 사실상 낭비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호의호식하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잘 대접하면, 그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즉시 자신을 저녁식사에 초대할 것이라는

계산에 따라 그들을 초대하는 것은 절대 기독교적 환대가 아니다.

이것은 이 땅에 속한 것, 즉 세상적인 것이며 아주 육신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희생이 전혀 없고 도덕적 가치도 전무하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불에 타버릴 ‘나무나 풀이나 짚’(고전 3:12)으로 평가될 것이다.

 

지금 내가 논하고 있는 이런 악은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악의 전모를 가차 없이 폭로하셨고, 그들은 그분에 대한 끝없는 증오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악했던 이유는 그들이 친구들을 대접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 중 가난한 사람들과 명성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들을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퍼부은 독한 비난 중 하나는 그분이 죄인들을 받아들여 함께

식사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극도의 교만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차갑게 거부한 최악의 죄인들보다 일곱 배나 더 악해졌다.

 

미국인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극구 찬양하지만 속으로는 계급의식이 아주 강하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정치가와 교육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보통 사람들을 높이고 만인평등을 옹호하지만,

그들의 실제 개인적 생활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차갑게 대한다. 지극히 오만한 군주가 보통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말이다.

명성이 자자한 사람, 부자, 유명인 대접을 받는 사람, 배우, 공인(公人), 이런저런 분야에서 스타가 된 사람,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상류사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수 계층이다.

이런 계층 아래에 ‘대중’이라고 불리는 익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입을 딱 벌리고 서서 감탄만

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들을 마음에 품으셨다는 것 외에는 이런 대중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주님이 이끄시는 온유와 겸손이 있는가?

교회 안에도 역시 계층의식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회의 계층의식이 교회 안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넘어온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완전히 이질적이고 전혀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하는 악의 뿌리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대개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삼아 시작하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하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만족을 느낀다. 그런 다음에는 점차적으로 계층화되는데, 이런 계층화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교인들의 부와 교육 수준이다.

 

이런 다양한 계층들 중 최상위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기둥 같은 존재가 되고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재빨리 차지한다. 그렇게 되면 큰 유혹이 그들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자기 계층의 구미에 맞는 쪽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그들 주위에 모래알처럼 많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소홀히 하고 싶은 유혹이다. 이내 그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이끌어주시려는 성령의 온갖 인도에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그들의 집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그들의 옷은 최고급품이며, 그들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는 배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종(某種)의 도덕적 충격의 강펀치를 맞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 구제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믿는 기독교를 옹호하느라고 열변을 토하고, 교회의 선한 사업에 거액을 기부한다.

 

내가 직설적으로 묘사한 이런 현실에 분개하지는 말자.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자.

가난과 눈물과 마음의 굶주림 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이 땅의 ‘잊혀진 자들’을 위해 헌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자.

 

- 하나님의 길에 우연은 없다 -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찬양하라, 내 영혼아! 최재식 2017.09.27 0 323
다음글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최재식 2017.09.25 0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