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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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최재식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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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원한다.

 

일반적으로 누가복음 15장의 마지막 비유는 실제로 두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야기는 대개 ‘탕자의 비유’로 불리지만, 실은 ‘동정하는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들의 비유’라고

해야 한다. 두 아들 다 각각의 방식대로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들의 죄는 더 쉽게 보인다. 그는 유산을 가지고 떠나서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한다.

결국은 유대인으로서 최악의 바닥까지 내려가 더러운 돼지들과 함께 우리에서 굶주리게 된다.

어쩌면 당신도 그런 처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곳에 있고, 하나님은 당신이 정신을 차려서

‘그래, 여기서 돼지가 먹는 음식이나 받아먹으려고 기다리다 말라죽느니 내 아버지께 가면 나에게 더

좋은 걸 주실거야’라고 깨닫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신은 그 예화 속에서 자신을 볼 것이다. 탕자를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이 두 점 있다.

하나는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것이 좀더 유명한 그림이다.

그러나 나머지 한 점 또한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여관의 탕자〉, 때로는 〈사창가의 탕자〉로 불린다.

한 남자가 무릎 위에 한 여자를 앉히고 있는 그림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그것이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그 장면에 자기의 얼굴과 아내 사스키아(Saskia)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렘브란트에 대해 좀 안다면 그가 죄인이었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 그는 탕자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 당신과 나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 큰아들은 어떤가? 그의 죄는 명백하지 않지만, 그도 분명 죄가 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에서 우리는 물리적 거리를 나타내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된다.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아들은 지금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를 열고 있다.

그러나 평생 집안에서 충실했던 큰아들은 지금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정의였다.

아버지가 그에게 ‘항상’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할 때 그는 아버지에게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라고 소리친다.

29절을 보라. 큰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한다.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중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주먹을 들어올리며 소리친다. “절대 아니에요! 저는 절대로 잘못한 게 없어요.

저는 한번도 충성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저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어요. 저에게 건강도, 직장도,

가족도, 제가 원하는 성공도 주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절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세요.”

 

하지만 아버지가 ‘항상’이라는 말로 어떻게 대답하는지 아는가? 31절에서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코웃음을 치며, 우리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신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와 말씀하신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그 비유는 두 잃어버린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둘 중 어느 한 죄인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탕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저분하다. 더럽다. 영적으로 망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정반대인 이들도 있다. 우리는 구원받은 탕자들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큰아들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든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을 곁눈질하며 쳐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고결한 척하고 잘난 척하는 부류를 싫어한다.

하나님이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찾기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탕자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주신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을 환영하며 그의 죄를 용서해준다.

또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오라며(28절) 부드럽게 애원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모두를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원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고 교만한 아들이 나머지 가족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작은 아들들과 큰 아들들에게 간청하여 둘 다 같은 교회 안에 있게 할 마음이 있는가?

예수님은 고의로 이야기의 결말을 열어두신다. 큰 아들이 어떻게 했는지 말씀해주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가 탕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계속 불평하다 지옥으로 갔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그 비유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초청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결말을 짓지 않으신 것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태도를 취하고, 말 안 듣는 자녀를 용서하고,

잔치의 기쁨에 동참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가정이 모든 종류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는 것을 깨닫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그 잃어버린 자들 안에는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 자신까지도 포함된다.

 

- 그분의 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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