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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관(黃樹寬) 박사 간증 (10월 19일(월) KBS 아침마당의 '인생수첩' ) 최재식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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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관(黃樹寬) 박사 간증

                     
 

   나는 원래부터 대학교수가 된 사람이 아니다.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연세대학교수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돼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나 하던 시절이었다. 포항의 영일중학에서 입학금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지게를 팽개치고 그 길로 14km나 떨어진 학교로 찾아갔다.




   "중학교에 다니고 싶어 경주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왔니? 이곳까지 걸어왔니?


   "아닙니다 뛰어 왔습니다"


   "오늘은 괜찮지만 학교는 매일 다녀야 하는데 너무 멀어서 안되겠구나"


   "아닙니다 입학만 시켜 주시면 열심히 다녀 보겠습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넣어 줄테니 열심히 해보거라"


   그렇게 해서 영일중학에 입학했다.


   학교까지 걸어가자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세 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서 달음박질을 쳐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면 어머니가 안타까워 울먹이셨다.


   "아이구 이 추운데 내복도 없이 저 어린것이 삼 십리 길을 걸어가다니..."


   포항은 경주에서 동쪽이라 아침에 학교 갈 때 해를 마주보고 세 시간을 가야 했고 학교가 끝나고 돌아올 때도 해를 마주보고 세 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다 봄볕에 하루 여섯 시간씩 햇볕을 쪼였으니 입학한지 얼마 안돼 얼굴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잠은 왜 그리 잘 오는지 새벽잠을 설치니 교문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와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황수관 나중에 학교 끝나고 교무실에 왔다가 "


   여선생님이셨다 멋진 투피스에 구두를 신고 그때는 구두를 신은 여자를 보기 힘들었다 인물도 예쁜 선생님께서 꾀재재한 날 부르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루종일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다가 교무실을 찾아갔다.

 

   "수관이 왔구나 선생님하고 들판에 나가서 같이 걸을까?"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들판에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수관이는 앞으로 공부를 잘 할 것 같아 영어 공부를 아주 잘 해 저 들판처럼 넓은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이야"


   그 날 이후로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등하교 때는 물론이고 집안 일을 도울 때도 영어 책과 단어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게를 질 때도 한 손에 꼭 쥐고서 일고 읽고 외웠다. 그랬더니 수업시간에도 영어책을 펼쳐놓을 필요가 없었다 책이 머리 속에 다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외워 보라 시키시면 일사천리로 줄줄 읊어 내렸다 만남의 인연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예나 이제나 중고등학교 때는 영어를 잘 해야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법 수학에도 원래 소질이 있는데다가 영어까지 잘 하니 공부 잘 한다는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집 근처 안강중학에 병설 농고가 생겨 장학생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50명 가량이 입학했는데 도중에 이 학교 저 학교 좋다는 곳으로 다 빠져나가고 13명이 졸업했다 덕택에 우리 학교에서 꼴찌를 졸업해도 전교에서 13등을 했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 수가 적어 우리만 졸업시킨 다음 학교 문을 닫고 말았다.


   대학에 가야 하는 데 사범학교에서 등록금을 받지 않고 공부시켜 준다는 이야기가 들렷다 입학시험을 쳐야 하는데 음악 미술 체육까지 이론 시험을 친다는 게 아닌가 농고에서는 그런 걸 아예 가르치지 않았다. 열 세 명을 모아놓고 닭이나 토끼 배를 갈라 내장을 들여다 볼 시간은 있어도 예능 시간은 아예 없었다 할 수 없이 책을 구해 독학에 들어갔다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빨주노초파남보 등등을 외웠다. 거기에다 옛 시조도 40수 가량 묻는다고 하기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등등을 줄줄이 읊어댈 정도로 연습을 하고 시험장에 갔는데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대구교육대학에 입학했다 학비는 면제였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잣집에 들어가 입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이 세 명을 차례로 가르치고 나면 밤 12시가 다 됐다 피곤했지만 내 공부를 다 챙긴 다음 잠자리에 들었더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 날 경주에서 찰떡을 한 보따리 해서 올라오신 어머니는 아들이 상 받는 걸 아시고 또 울음을 터뜨리셨다.


   "아이구 장하다 내 아들 혼자서 벌어가며 공부했는데 우등상까지 받다니...


   나중에 교수가 된 것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덕택이다.


   졸업성적이 우수하다고 시골로 보내지 않고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국민학교에 발령이 나서 야간대학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학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공부에 한이 맺혀 야간 대학에 야간 대학을 거치다 보니 결혼 후에도 집안 살림이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글세방 얻을 돈도 없어 길에 나앉을 판인데 아내가 예쁘게 화장을 하더니 이모님 댁으로 가자고 했다 어릴 때 자기를 길러 주신 분인데 13평 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아내의 화장은 얼굴에 새까맣게 낀 기미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모님은 금방 눈치챘다 갈 데가 없이 방 한 칸을 얻으려고 왔다고 하니까 노발대발하셨다.


   "저 뒤에 황서방 저 사람은 머 하는 사람이야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이 고생을 다시키고 저런 사람하고 같이 살 순 없어"


   "이모야 황서방 잘못한 것 없다 공부한다고 힘이 들어 그렇다 학위만 끝나면 고생 안 시킬끼다."


   울먹이는 아내의 말에 이모님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구 그래 같이 살자"


   아무리 이모님이래두 두 칸 짜리 아파트에서 방 한 칸을 내주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지금도 이모님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그 날 저녁 이사짐을 옮기는데 농짝 하나를 넣으니 온 방이 다 차 사람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끄집어내어 바깥에 두었는데 밤새 도둑 맞고 말았다 서러워서 엉엉 우는 아내에게 "걱정 마 돈 벌면 농부터 사 줄 꼐"라고 말했더니 대꾸가 걸작이었다.


   "아이구 농부터 사모 우짜노 집이 있어야제"


   그렇게 어렵게 살 때 주님을 만났다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슬금슬금 멀어져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아버지 형제가 다 믿음이 독실했다 백부는 키가 작은 분이신 데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이 "너거 큰아부지는 작은 예수다"라고 말했다.

 

   어느 해 가을 홍수가 들어 논에 세워놓은 볏단이 다 떠내려가는 것을 보시고도 건질 생각을 않고 돌아서며 엉엉 우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주일 날 일하는 모습을 동생들과 어린 조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건질 수 있는데도 그냥 포기하신 것이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서도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다가 성경공부를 시키시던 분이셨다 국민학교도 안나오신 분이 그 정도였다.


   아버지는 늘 "삼 시 세끼 죽을 먹더라도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해방 전에 일본에 사셨을 때 매일 포도밭을 지나다니셨다고 한다. 하루는 일본인 포도밭 주인이 포도를 한 소쿠리 갖고 와서 묻더란다 당신 포도 먹을 줄 아는 사람이냐고 그래서 잘 먹는다고 했더니" 매일같이 포도밭은 지나다니면서 한 송이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하면서 포도밭을 가지라고 거저 주는 바람에 부자가 됐다고 한다 한번은 쇠고랑 찬 사람이 순사에게 쫓겨 들어오자 숨겨두고 "여기엔 그런 사람 온 적 없다"고 호통을 쳐서 순사를 내쫓고 밤새 줄을 갈아서 쇠고랑을 끊어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 후에 인심이 나빠지고 모든 걸 그냥 두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바람에 살림이 궁핍하게 됐다 아버지 연세가 올해 88세, 팔팔하게 생활하고 계신다.


   내 동생들도 다 교회에 착실히 나가 직분을 맡고 있다.


   그런 가정에서 난 내가 교회를 멀리 하다가 다시 주님을 만나고 보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 기쁨을 예수 모르던 사람들에게도 전하고싶어 전도를 결심했다. 마침 춘천에 있는 한림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교수님대신 참석해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교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믿어지지 않았다.


   "교수님 저는 아직 참석할 자격이 안됩니다"


   "아니야 황 선생이 가도 괜찮아 자격이 충분해"


   그렇게 해서 출발하는 길에 난생 처음 전도지를 여러 장 만들어 가방 속에 고이 넣었다 춘천에 온 다른 교수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논문 발표에 온통 신경을 쓰다보니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전도지 돌리는 일은 까맣게 잊어먹고 말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경춘선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저 앞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 눈에 들어왔다. 옳지 저분에게 전도해야지 마침 그 분 앞에 자리가 비어 있어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이화여대에 계시는 분이었다 가방을 열고 전도지를 꺼내려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조심스레 꺼내 교수님꼐 드리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릴 말했다.


   "저어 제가 교회에 다니는데 제가 만난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세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군요 사실은 저도 교회 집삽니다"


   "아이구 실례했습니다. 난생 처음 전도지를 돌리려다 그만 실수하고 말았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도 전도지 한 장 나눠 준 적이 없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운을 뗀 교수님은 서울까지 가는 두시간 동안 내내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셨다. 덕택에 그 분을 전도하려던 내가 도리어 은혜의 소낙비에 흠뻑 젖고 말았다.


   청량리에 도착할 무렵 교수님이 물으셨다.


   "경북대학은 어떻습니까?"


   "예, 한강 이남에선 제일 가는 대학이지요"


   "그러면 연세대학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훨씬 더 좋은 학교지요"


   "앞으로 우리 주님이 황 장로님을 크게 들어 쓰실 겁니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한 열흘쯤 지나 그 교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황박사 연세대학에서 교수 공개채용을 하고 있으니 한번 이력서를 내 보세요"


   얼마나 반갑던지 그 길로 얼른 이력서를 써서 연세대로 보냈다.


   하지만 미국 하버드 영국 옥스퍼드 등 세계 일류대학에서 공부한 쟁쟁한 사람들도 많은데 국내에서 야간 대학에 야간대학을 거치며 어렵게 박사가 된 내가 되리라 곤 믿어지지 않았다. 한 달쯤 있다가 합격했다는 통지서가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수고한 일꾼을 절대로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도지 한 장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내민 그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연세대학교수로 채용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이다.


   부족한 나를 교수로 채용해 준 연세대학도 고맙기 짝이 없다.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도 대학발전 기금을 모집할 때 아낌없이 내놓았다 강의도 열심히 했다 아침 일찍 교문도 열기 전에 학교에 도착하면 수위들이 야단이었다. 아이구 교수님 푸욱 주무시고 늦게나오세요 밤새 강의 준비를 해서 모든 자료를 머리에 넣고 강단에 섰다 책은 그냥 교탁에 두고 머리에 든 것을 학생들에게 쉽게 설명했더니 학생들 사이에 명 강의란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어느 날  KBS 기자가 찾아와서 방송에 좀 출연해 달라고 했다.


   시간을 얼마나 줄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20분을 주겠다고 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돼야 할 말을 다하지 그렇게 짧아선 출연 못하겠다고 했더니 단 2초 밖에 못나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시냐는 말에 못이기는 체 승낙했다. 오후3시에 방송이나가 27분 동안 떠들었는데 피디가 시간이 넘었다고 야단이었다.


   이 방송을 sbs사장이 보고'다른 방송국에서 전속계약을 맺기 전에 빨리 황수관 박사를 데려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직원이 찾아 왔길래 시간을 얼마나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음대로 쓰시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 '신바람건강 1234'라는 제목으로 두시간 씩 2부로 나눠 방송하기로 합의했다.


   첫날 방송이 나가자마자 난리가 났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입이 달싹거려 참지 못하고 직장동료나 이웃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어제 밤 tv봤어? 황수관 박사란 사람이 나왔는데 정말 재미있더라. 오늘 저녁에 또 하는데 꼭 한번 봐"


   다음날 저녁 서울거리에는 택시 손님이 없어 운전기사들이 식당 앞에 차를 세워두고 모두 내 프로를 시청했다고 한다. 다른 방송사 사람들도 그 시간에 자기네 방송 대신 sbs를 시청했다니 선거개표 방송을 제외하고 최대의 시청률이었다고 야단들이었다.


   일단 매스컴을 타자 여기 저기 방송사와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인터뷰를 하겠다고 야단들이었다 강의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사양하자 강의실 창 밖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 가는 바람에 할 수없이 호텔에다 모두 모아놓고 공동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떴다는 걸 실감한 것은 CF모델로 출연해 달라는 교섭이 오면서부터 어느 날 서울우유에서 찾아와서 간청했다.


   "우리 사장님이 황박사님께서 TV에 나와 우유가 건강에 좋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시고 꼭 모셔오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대우는 어떻게 하겠소?


   "최고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봉투를 한 장 놓고 갔는데 열어 보니 자그마치 2억 원 미국 돈으로 20만 불에 가까운 거액이어서 믿어지지 않았다.


   2천만 원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라 다시 쳐다봐도 분명히 2억이었다.


   당장 받고 싶었지만 연세대학 교수가 연세우유가 아닌  서울우유에 출연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 사양했다. 그랬더니 서울우유에서 바로 연세대학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황수관 박사가 과연 황금을 돌같이 아는 사람인지 물으면서 출연 좀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총장님께서는 내 처지를 잘 알고 계셨다 다른 교수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자가용도 없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전철역에서 꼬박 20분씩 걸어다니는 걸 보셨기에 연세우유걱정은 말고 그 돈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동료 교수들에게 의논해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퇴직금을 통틀어도 2억이 안되니 어서 받으라고 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갔더니 평소 존대 말을 꼬박꼬박 쓰는 아내가 붙잡고 말했다.

 

   "받을래? 안 받을래? 부모님에다 처자식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  그 돈을 안받아? 당장 받아 온 나"


   교회 담임 목사님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황장로 그 돈 받아서 일부를 건축헌금으로 내면 좋겠소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려울 때 할 일이 기도 밖에 더 있는가 "아들아, 받아라"라는 말씀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무릎을 꿇었는데 "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꾸 들려왔다 그 길로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랬더니 다른 교수들이 야단이었다 황 교수 정말 대단해 그 돈을 거절하다니 어렵게 살면서 대학 발전기금도 많이 내놓더니 앞으로 정말 큰 일 하겠어 사실 동료 교수들이 우리 집에 한번 찾아왔다가 초라한 살림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초라한 살림에도 아이들이 잘 따라준 것은 가족회의 덕택이다.


   어려운 처지를 당할 때마다 딸 둘 아들하나 전가족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한다 "아파트 주인이 전세를 올려달라는데 돈은 없고 어떡하지?"


   그러면 큰딸이 말한다


   "그럼 평수를 줄여 가면 되지요"


   "그래도 너희들 괜찮겠어?"


   "그럼요 참을 수 있어요"


   싼값에 넓은 집에 살려다 보니 군포 근처 산본리까지 내려가게 됐다


   정말 미국에 와보니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캐롤라이나 지역에는 나무 중에서도 사람 몸에 제일 좋다는 소나무가 많아 특히 부럽다 항상 이런데서 살다보면 좋은 줄도 모르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


   서울우유 광고를 거절하고 열흘쯤 뒤에 다른 회사의 CF교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위스키 광고였다 예수 믿는 사람이 독한 술을 한잔씩 꼴깍꼴깍 마시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바로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돼 다른 회사에서 교섭이 들어오는데 모두 A급 회사로 열네 군데서 출연해 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먼저 돈으로 시험해 보식 합격하자 축복을 내려 주신 것이다. 여기 저기 들어오는 대로 출연하다 보니 모두 27개 회사의 CF에 출연하는 신기록을 세우게 됐다.

 

   제일 기억나는 광고는 현대자동차 얼마나 주겠냐고 물었더니 교수님 마음대로 정하란다 세브란스병원에 최고급 엠불런스 두 대를 기증해 달라고 했더니 즉각 수락했다 덕택에 한국에서 가장 좋은 엠불런스 두 대가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위급한 환자를 수송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CF는 로마에서 찍었다. 콜로세움을 거쳐 영화 '로마의 휴일'의 무대였던 스페인광장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간 14명과 현지인 11명 등 모두 25명으로 구성된 팀이 촬영에 들어갔다. 큰 팀이 촬영하는 걸 보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내가 인기스타나 되는 줄 알고 손을 흔들었다. 첫 커트에 내가 한발을 앞으로 쭈욱 빼고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유럽 사람들도 차볼 줄 아네 라고 말하자 감독이 칭찬했다. 시키는 동작만 잘 할 뿐만 아니라 창의적으로 개발한다니 하여튼 교수 대신 배우가 됐어도 대성했을 것이라면서 손을 약간 올려라 투스텝 박자가 틀렸다 웃음은 참 좋았는데 눈이 찌끄러졌다 등등 온갖 구실을 붙여 찍고 또 찍다 보니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지난 번 총선 때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다. 이번에 미국에 와서도 많은 분들로부터 염려하는 말씀을 들었다 출마동기는 혼탁한 정계에 들어가 신바람을 불러 일으켜 보겠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김장환 목사님께서 특히 격려해 주었다 경상도 출신이니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고향에서 출마하면 당선가능성이 높았지만 지역감정 해소를 통한 국민화합에 도움이 되고자 민주당에 들어가 마포 지역구를 맡았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 지원유세를 위해 여기 저기 뛰다 보니 표밭 관리 소홀로 떨어지고 말았다.

 

   표차는 691표 그 숫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에 0자만 하나 더 붙이면 0691 교회나 목사님 전화번호로 많이 사용되는 숫자였다.  어디로 가든지 영육구원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선거에 진 다음날 방구석에 처박혀 숨어 있고 싶은 심정인데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생각났다.

 

   투표전 날 오후 동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나를 알아본 아이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사인을 해 달라고 야단이었다. 그래서 약속했다 내일이 선거라서 시간이 없으니 선거 다음날 이 시간에 다시 여기서 만나 사인을 해 주마 그 많은 아이들이 다 나오지는 않고 몇몇은 나오겠지 짐작하고 약속한 시간에 나갔다. 수많은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뭉클했다 이래서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구나 저마다 종이를 들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사인을 해주니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박사님 너무 실망하지 마셔요. 다음에는 꼭 당선되실 거예요"


   "그래 그래 고맙다 너희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노력할 께"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정치계에 신바람을 불러 일으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니라 세상정욕을 탐하지 않고 영육구원을 위해 일하던 부족함이 많은 나를 들어 사용하고 계신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리라 믿으며 모든 영광을 그 분께 돌려 드린다. (2002. 11. 22. 캐롤나이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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